질병/의료

[질병의 역사와 의학] <12> 세계 5천만 명을 앗아간 팬데믹 ‘스페인독감’

발병은 스페인이 아닌, 1차 세계대전 참전 미국 군대
전 세계 인구 3분의 1인 5억 명 감염 추산
일제 강점기 조선 백성도 14만 명 사망 추정
투명한 정보 공개와 국제 공조를 교훈으로 남겨

한국헬스경제신문 한기봉 기자 |

 

1918년 가을. 미국 동부의 한 군항에서는 아침마다 군악대 소리 대신 장례 행렬이 이어졌다. 병사들은 전날까지만 해도 멀쩡히 훈련을 받다가 고열과 기침, 심한 호흡곤란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불과 이틀 만에 폐가 피로 가득 차 숨을 거두는 일이 속출했다. 병실은 물론 복도와 체육관까지 환자로 가득 찼고, 의사와 간호사마저 차례로 감염됐다.

 

불과 몇 달 사이 이 정체불명의 독감은 전 세계를 휩쓸었다. 훗날 ‘스페인독감(Spanish Flu)’으로 불리게 된 이 팬데믹은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감염병 가운데 하나로 기록된다.

 

놀라운 사실은 이 독감이 스페인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전쟁이 키운 보이지 않는 '적'

 

1918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던 시기였다. 수백만 명의 병사들이 참호 생활을 하며 좁은 공간에서 함께 생활했고, 병력과 군수물자를 실은 배와 열차가 대륙을 오갔다. 감염병이 퍼질 수 있는 최악의 환경이었다.

 

독감의 정확한 발생지는 지금도 논란이 있지만 미국 캔자스주의 군부대에서 시작됐다는 설이 정설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 북부 전선이나 중국에서 비롯됐다는 주장도 있다. 어느 곳이 진원지였든, 전쟁은 바이러스가 국경을 넘어 퍼지는 거대한 통로가 됐다.

 

당시 병사들은 유럽과 북미, 아시아, 아프리카를 오가며 자신도 모르게 바이러스를 옮기는 역학을 했다. 수송선과 군용열차는 거대한 감염 통로가 됐다.

 

◇그런데 왜 ‘스페인 독감’일까

 

‘스페인 독감’이라는 이름은 사실 역사적 오해에서 비롯됐다. 전쟁 중이던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교전국들은 군의 사기 저하를 우려해 독감 확산 사실 보도를 철저히 검열했다. 언론은 환자와 사망자 발생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다.

 

반면 중립국이었던 스페인은 언론의 자유가 비교적 보장돼 있었다. 1918년 5월, 국왕 알폰소 13세를 비롯해 정부 고위 인사들이 독감에 걸렸다는 사실이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국제사회는 스페인 신문을 통해 처음 이 질병의 심각성을 접했고, 자연스럽게 “스페인에서 시작된 독감”이라는 인식이 세계에 퍼졌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의학사 연구자들은 스페인이 발원지라는 증거는 없다고 본다.

 

결국 이 질병의 이름은 바이러스의 출생지가 아니라 언론 보도의 결과로 붙은 셈이다. 전쟁은 진실을 숨겼고, 정보의 부재와 무지는 바이러스만큼 빠르게 세계로 퍼져나간 것이다.

 

◇세계 인구 3분의 1인 5억 명 감염

 

세계보건기구(WHO)와 여러 연구에 따르면 스페인 독감이 유행한 1918~1920년 3년간 당시 세계 인구 약 18억 명 가운데 약 5억 명이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당시 인류의 약 3분의 1에 해당한다.

 

사망자는 최소 2천만 명에서 최대 5천만 명으로 추산됐다. 일부 연구는 1억 명에 이르렀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전쟁으로 숨진 사람보다 독감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많았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예외였을까? 당시 일제강점기 조선도 피해가지 못했다. 전국적으로 독감이 퍼져 수십만 명이 감염됐고, 약 14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의료 기반이 열악했던 농촌에서는 정확한 통계조차 남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젊은이가 더 많이 죽은 이상한 독감

 

스페인 독감은 기존 독감과 다른 특징을 보였다. 일반적인 계절 독감은 면역력이 약한 영유아와 노인에게 치명적이지만, 스페인 독감(A형 인플루엔자 H1N1)은 오히려 20~40대의 건강한 청년층에서 높은 사망률을 보였다.

 

오늘날 전문가들은 건강한 면역체계가 바이러스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사이토카인 폭풍(cytokine storm)’이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였을 것으로 분석한다.

 

면역세포가 지나치게 활성화되면서 오히려 자신의 폐 조직까지 공격했고, 환자들은 심한 폐렴과 호흡부전으로 숨졌다.

 

많은 환자의 얼굴은 산소 부족으로 푸르게 변했고, 일부는 감염 후 이틀도 채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백신도 항생제도 없던 시대

 

1918년에는 독감 바이러스가 무엇인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했다. 바이러스는 세균보다 훨씬 작아 당시 광학현미경으로는 관찰할 수 없었다. 전자현미경이 개발되기 전이었다.

 

의사들은 세균성 질환이라고 오해하기도 했고, 효과적인 치료법은 거의 없었다. 해열제와 안정, 수분 공급 정도가 전부였다.

 

오늘날 폐렴 환자에게 사용하는 항생제도 없었다. 많은 환자는 독감 자체보다 뒤이어 발생한 세균성 폐렴으로 목숨을 잃었다.

 

◇스페인 독감이 남긴 유산

 

아이러니하게도 인류는 이 거대한 비극을 통해 감염병 대응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국가 차원의 감염병 감시체계가 강화됐고, 공중보건 정책이 발전했다.

 

이후 바이러스 연구가 본격화했으며, 독감 백신 개발과 예방접종 체계도 구축되기 시작했다.

 

1957년 아시아 독감, 1968년 홍콩 독감, 2009년 신종플루, 그리고 2020년 코로나19에 이르기까지 세계는 새로운 팬데믹을 겪을 때마다 스페인 독감의 교훈을 떠올리게 됐다.

 

스페인 독감이 남긴 가장 큰 교훈은 무엇일까. 감염병 대응에는 투명한 정보 공개와 국제 공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한 유명인사들

 

 

독감 바이러스는 사람을 가릴 수 없다. 스페인 독감은 예술계와 학계, 정치계의 유명 인사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일부 인사들은 감염됐다가 살아남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는 191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폐렴과 독감 증세가 겹치면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스페인 독감이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사망에 영향을 준 사례로 널리 언급된다.

 

클림트의 제자이자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로 불린 에곤 실레 (1890~1918)도 임신 6개월이던 아내가 스페인 독감으로 먼저 숨진 지 사흘 후 본인도 감염돼 2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두 화가의 죽음은 오스트리아 빈 분리파 시대의 종말을 상징한다.

 

현대 사회학의 거장이자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집필한 독일의 석학 막스 베버(1864~1920)도 1920년 스페인 독감에 따른 폐렴으로 사망했다.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8)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머리 부상을 입은 뒤 회복 중 스페인 독감에 감염돼 사망했다.

 

흥미로운 점은 주요 정치 지도자들은 상당수가 감염됐지만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 도중 독감에 걸렸지만 회복했다. 당시 그의 건강 악화가 협상력에 영향을 미쳤다는 말도 전해진다.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도 1918년 감염됐으나 회복됐다.

 

화가 가운데 살아남아 이 질병을 작품으로 남긴 사람도 있다.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다. 그도 감염됐으나 회복했고 ‘스페인 독감에 걸린 자화상’, ‘스페인독감 후의 자화상’ 등을 그려 당시의 고통을 그림으로 남겼다. 병색이 완연한 얼굴과 침대, 의자만으로도 당시 팬데믹의 공포를 생생하게 전달했다.

 

뭉크는 이 두 작품을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라 ‘질병의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나를 결핵으로 잃었고, 평생 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작품의 중심 주제로 삼았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이 작품을 팬데믹이 인간에게 남긴 신체적·정신적 상처를 가장 강렬하게 보여주는 그림 가운데 하나로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