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의료

정부, 2000명 의대 증원 확정...‘투쟁’ ‘협상’ 갈림길 선 의료계

교수 집단 사직 현실화?
“얻을 건 얻자” 협상론 나올 가능성

한국헬스경제신문 한기봉 선임기자 |

 

(의대 증원 교육부 발표자료)

 

이제 공은 의사와 의대생들에게 넘어갔다. 정부가 20일 각 대학한테 받은 올해 총 2000명 의대 증원 신청을 지역·대학별로 배분한 결과를 발표했다. 의료계의 증원 반대나 증원 규모 축소에 쐐기를 박아버린 것이다.

 

집단 이탈, 휴학, 사직서 제출 등 단체행동을 통해 정부를 압박해온 대학병원과 종합병원 전공의와 의대 교수, 의대생들은 투쟁 계속이냐, 협상이냐 선택의 갈림길에 놓였다.

 

의료계는 당장 정부의 발표가 의대 교육 여건을 고려하지 않은 정치적 결정이라며 철회를 강력 촉구했다. 일단 반발의 강도도 커지고 있다. 하지만 대학 입시가 우리 사회 전반에 미치는 파급효과를 생각할 때 정부가 발표된 정원 확대를 취소하거나 증원 규모를 축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정부-의료계의 갈등이 2라운드에 접어든 셈이다. 그 와중에 병원을 찾는 국민들만 고생하게 됐다.

 

교육부는 20일 의대 증원 규모 2000명을 지방 대학에 전체의 82%인 1639명, 수도권에는 18%인 361명을 배정했다. 서울 지역 대학은 1명도 증원하지 않았다. 필수의료를 살리기 위해 의대 증원을 추진한 만큼 지방 거점 국립대 의대에 치중했다.

 

정부 발표 직후 전국 의과대학 교수협의회와 전공의협의회, 의사협회 등은 의·정 갈등 사태가 촉발된 후 처음으로 머리를 맞댔다. 단체들은 20일 오후 온라인 회의를 열고 앞으로 갈 방향을 논의했다.

 

사직서 제출 디데이를 25일로 예고했던 전국 의대 비대위 교수들은 사직서 제출을 독려해 강경 대응하겠다는 입장이다.

 

의대생들도 반발하고 있다. 40개 의대 학생 대표들 명의의 공동성명서를 내면서 일방적인 정부 발표를 인정하지 못하며, 휴학계를 수리하지 않으면 행정소송에 나선다고 경고했다. 학생들은 해외 의사면허 취득을 지원하겠다는 말도 했고 동맹휴학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일각에서는 조심스럽게 2000명 증원이 되돌릴 수 없는 만큼 협상론이 고개를 들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투쟁으로는 더 이상 정부 정책을 되돌리는 게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필수의료 지원책 등 얻어낼 것은 얻어내자는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관측이다.

 

정부는 이를 의식한 듯 전공의 복귀를 압박하기 위해 면허정지 처분이라는 ‘채찍’과 근무여건 개선이라는 ‘당근’을 함께 사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는 19일 의료 현장을 이탈한 전공의 등 1308명에게 ‘즉시 소속 수련병원에 복귀하라’는 업무개시명령을 공시 송달했다. ‘3개월 면허정지’를 내용으로 하는 행정처분 사전통지 절차의 마무리 단계다.

 

이와 함께 21일 의사 처우 개선 토론회를 열어 의료계 달래기에 나섰다. 보건복지부는 이날 오후 서울 중구 프레지던트호텔에서 전공의 처우 개선 논의를 위한 전문가 토론회를 열고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을 위한 의견을 수렴했다.

 

정부는 대형병원의 과도한 전공의 의존을 완화하고 전공의 장시간 근무도 단축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소아청소년과 전공의들에게 매달 100만 원씩 수련비용을 지원하고 분만·응급 등 다른 필수의료 과목 전공의들로 지원 대상을 넓힌다는 방침이다.

 

의대 교수들이 집단 사직을 결의한 데다 곧 있을 대한의사협회 새 회장 선거 후보들이 ‘강경 투쟁’ ‘반정부 투쟁’ 목소리를 높이고 있어 의료 공백 사태는 심화할 것이라는 우려도 여전하다.

 

의협은 일단 정부와 협상의 문은 열어놓고서 차기 회장 선출을 계기로 집단 휴진이나 야간·주말 진료 축소 등을 촉구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2020년 의협이 정부의 의대 증원 추진에 반발해 집단 휴진을 선언했을 당시 참여율은 10%가 채 되지 않았다.

 

교수들이 사표를 던진다고 해도 곧바로 대형 병원의 진료가 중단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표가 수리될 때까진 환자 곁을 지키겠다는 교수들이 다수이기 때문이다. 사표가 수리될 가능성도 매우 낮다. 하지만 정부가 이탈한 전공의들에게 면허정지 등 처벌을 실제로 시행할 경우 교수들의 반발 강도가 커져서 태업이나 진료 중단이 가속화할 수도 있다.

 

만약 교수 절반 이상이 실제로 병원을 떠나면 대형 병원의 응급 환자 수술과 입원은 전면 중단될 가능성이 높다. 응급실에 실려온 환자에게 기본적 처치만 하고 최종 치료나 수술은 하지 못하고 돌려보낼 공산이 크다. 대형 병원은 교수가 3분의 1정도만 이탈해도 응급환자 수술이 큰 차질을 빚을 것으로 보인다.

 

교수들 상당수가 사직 후 근무를 하면서 환자 진료 건수를 줄이는 태업을 하면서 정부와 협상을 이어갈 가능성도 점쳐진다. OECD 평균 수준에 맞춰 의사 수를 늘리겠다는 정부주장에 맞서 진료 환자 수도 OECD 수준으로 낮추겠다는 말을 하는 의사들도 많다. 우리나라 의사의 평균 연간 진료 환자 수는 6900여 명으로 OECD 평균(2100여 명)의 3배에 달한다. 의사들이 태업을 하면 수술이 수개월이나 길게는 1년씩 연기되고 신규 환자도 외래 진료를 받기가 어려워진다.

 

정부가 실제로 의대 증원을 발표해 의대 입학 문이 크게 넓어지자 고등학교와 대입 학원가, 이과 계열 대학생들 사이에는 이번 기회에 의대에 진학하겠다는 움직임도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의대 증원 발표를 뒤집어 학생과 학부모들의 비난을 자초하지는 않을 것이다. 의사들의 집단행동이 무작정 이어지면 의대 진학을 원하는 수험생과 학부모들과 불화가 생길 수도 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립이 해소되려면 아직은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길면 2~3개월 정도 예상되지만, 의외로 양측이 협상 테이블을 통해 주고받는 게 있으면 조만간 해결될 가능성도 있다. 여론이 곱지 않은 상황에서 의료계도 무작정 투쟁만 하면서 환자를 외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