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젠더

‘임신 36주 낙태’ 영상 후폭풍...대체입법 손 놓은 정부와 국회

경찰 낙태 영상 올린 20대 여성 유튜버 살인죄 수사
여성단체, “정부가 책임 방기하고 여성에게만 책임 물어”
낙태죄 ‘헌법불합치’ 5년 지났어도 대체입법 전혀 진전 없어
여성단체, “임신중지약 도입, 임신중지 보험 적용” 촉구

한국헬스경제신문 김기석 기자 |

 

지난 13일 유튜브에는 ‘총 수술비용 900만 원, 지옥 같던 120시간’이라는 낙태 경험담 영상이 올라왔다. 해당 영상 속 여성은 자신이 임신 36주 차에 임신중지 수술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 영상은 경찰 조사 결과 조작이 아닌 실제로 있던 일로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경찰은 유튜버의 신상과 병원을 찾아냈고 압수수색을 했다. 경찰은 낙태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고 보건복지부에서 살인 혐의로 수사 의뢰를 한 만큼 일단 해당 여성과 의사에게 살인 혐의를 적용해 수사 중이

다.

 

 

이 사태로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낙태죄 폐지 이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대체입법 공백과 의료 체계에 대한 비판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경찰이 영상을 올린 20대 여성을 살인 혐의로 입건해 수사하자 여성·인권단체들이 정부가 낙태와 관련한 의료 시스템을 붕괴시켜놓고 모든 책임을 여성에게만 전가한다며 반발하면서 조속한 대체 입법을 촉구했다.

 

◇낙태죄 폐지와 후속 입법 문제

 

낙태죄는 산모나 의사 모두에게 불법이 아니다. 헌법재판소는 2019년 4월 ‘여성의 신체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며 형법상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2021년 1월 1일부로 임신중절수술은 합법화됐다.

 

헌재는 판결과 함께 2020년 12월 31일까지 대체입법을 마련하라고 국회에 주문했다. 그러나 국회는 시한까지 관련 법률 개정을 마무리하지 못했고 5년째 낙태와 관련한 법은 공백 상태다.

 

헌재 판결 이후 정부안 1건, 국민의힘 2건(서정숙, 조해진), 더불어민주당 2건(권인숙, 박주민), 정의당 1건(이은주) 등 총 6건의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낙태를 허용하는 임신 기간 등과 관련된 이견이 커 결론이 내려지지 못하고 있다.

 

조해진 의원안은 태아의 심장박동이 감지되기 시작하는 6주 이전까지만 낙태를 허용하고 사회·경제적 사유 및 강간에 의한 임신, 임신부의 건강 위험 등의 사유가 인정될 때만 기간을 10~20주로 연장한다는 것이다. 반면, 권인숙·박주민·이은주 의원안은 아예 기간 제한을 없앴다.

 

정부는 2020년 말 시한 세 달을 앞둔 10월에야 여야 개정안을 절충해 사유에 따라 낙태 허용 기간을 14~24주로 적용하는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으나, 여성단체와 종교계는 이에 반발했고 후속 논의와 사회적 합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2월 28일에는 임신 32주 이전에 태아 성별을 알려주는 것을 금지한 의료법 20조 2항에 대해서도 재판관 6 대 3 의견으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해당 조항은 즉시 무효가 됐다.

 

◇여성계 반발과 입장

 

여성계는 낙태죄가 사문화되자 유산유도제 도입 및 필수의약품 지정, 임신중지 수술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 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후속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어 임신중지를 위한 의료체계는 공백 상태이며 여성의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는 여전히 사각지대에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한 해 합법적인 낙태 수술은 3000여 건 정도다. 그러나 가임기 여성을 대상으로 한 보건복지부의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실제 낙태 수술 횟수는 심평원 통계의 10배가 넘는다.

 

이는 전체 낙태 건수의 10%만 건강보험 적용을 받고, 나머지 90%가 법의 테두리 밖에 방치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행 모자보건법은 인공임신중절에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경우를 ▲본인 및 배우자에게 유전적 정신장애 및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강간·준강간으로 임신한 경우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인척 간 임신인 경우 ▲임신부의 건강이 위험한 경우 등으로 제한하고 있다.

 

입법 공백이 계속된다면 여성들은 계속 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못한 채 상당한 비용을 들여 음지에서 낙태 수술을 받아야 한다. 낙태 수술 비용도 병원마다 천차만별이고 비용도 크게 올랐다.

 

임신중절약 도입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이마저도 정부는 소극적이다.

 

전문가들은 입법 공백을 메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성이 안전하게 임신중지 수술을 받을 수 있는 보건의료 체계 마련이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의 나영 대표는 “복지부의 역할은 처벌이 아닌 임신중지를 안전하게 할 수 있는 보건의료 체계를 마련하는 일”이라며 “임신중지가 비범죄화가 된 지 5년이 지났는데, 지원책 마련 요구에 아무것도 안 하다가 갑자기 살인죄를 의뢰하겠다는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라고 비판했다.

 

37개 시민단체가 모인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은 13일 성명을 내고 “처벌은 임신중지 결정을 지연시키고 더 비공식적이고 위험한 임신중지를 만들 뿐”이라며 “입법 공백으로 인해 살인죄가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어떻게든 여성들을 처벌하는 방식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부의 태도가 문제”라고 꼬집었다.

 

이 단체는 “임신중지는 비범죄화 이후에도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의료비는 부르는 게 값이고 유산유도제는 온라인 암시장을 떠돌고 있다”며 “보건복지부가 손을 놓고 있는다면 비슷한 일은 또다시 반복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약사 172명, 의사 59명, 시민 1625명 등이 3차례에 걸쳐 유산유도제 도입·필수의약품 지정을 촉구하는 민원을 식약처에 제출했지만, 식약처는 “이해당사자 간 사회적 합의가 선행돼야 한다”고 답변하며 유산유도제 도입을 거부했다.

 

경찰은 현재 낙태약 ‘미프진’의 온라인 거래 행위에 대해서도 불법성 및 수사 필요성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