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잇따르는 ‘교제살인’, 대책이 없다

한국여성의전화, “지난해 138명 살해, 311명 살인미수”
교제살인 경찰통계조차 없어
교제폭력 관련 법령도 부재
“강력범죄로 규정하고 예방조치 마련해야”

한국헬스경제신문 한기봉 기자 |

지난 6일 서울 강남역 인근에서 20대 의대생이 헤어지자는 여자친구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잇따른 교제살인·데이트폭력을 막을 대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고 있다.

 

이런 사건들의 발생 유형 통계를 축적하고 범행 경위와 특징을 분석해 그에 맞는 법령을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여자친구를 살해한 피의자 A씨(25)는 구속돼 수사를 받고 있다. A씨는 “헤어지자”는 말에 범행을 저질렀는데 범행 장소인 건물 옥상은 평소 두 사람이 자주 갔던 곳이었다.

 

A씨는 수능 만점을 맞아 여러 영상에도 소개됐고 서울의 명문대 의대 재학 중이어서 사회에 던진 충격이 더 컸다.

 

◇교제살인 공통점은?

 

교제살인이나 폭력은 대체로 두 사람만이 아는 익숙한 장소에서 일어난다. 여성이 헤어지길 원하나 남자는 그렇지 않을 때 “할 말이 있다”며 데이트하던 장소로 불러내거나 여성의 집으로 찾아가 우발적 또는 계획적으로 범행한다.

 

피의자는 또 그 이전에도 폭력이나 위협을 행사하거나 과도하게 집착한 징조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실제로 범행 이전에 여성에 의해 교제폭력으로 신고된 경우가 많다.

 

지난 3월 경기 화성시에서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여자친구 어머니에게 중상을 입힌 대학생 김레아(26)의 경우도 그렇다. 피해 여성이 견디다 못해 어머니를 대동하고 이별을 통보하려고 그가 사는 오피스텔에 찾아오자 범행을 저질렀다. 그는 이전에도 과도한 집착을 보이고,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달 경남 거제시에서는 20대 남성이 술을 마시고 전 여자친구 원룸에 찾아가 폭행해 숨지게 한 사건이 있었다. 피해 여성은 앞서 1년여간 12차례나 교제폭력 신고를 했었다.

 

◇교제폭력 현황

 

교제살인이 잇따라 발생하자 한국여성의전화가 9일 성명서를 발표하고 대책을 호소했다.

 

여성의전화는 성명서에서 “최근 보도된 강남 교제살인, 거제 교제살인 사건은 특수한 개인, 악마화된 개인에 의해 발생하는 사건이 아닌,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여성폭력 사건 중 극히 일부”라고 말했다.

 

여성의전화는 알려진 범행만 따져도 지난해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해 살해된 여성은 138명이며 살인미수는 311명이라고 밝혔다. 2.7일당 1명의 여성이 아는 남성에게 살해된 것이다. 살인미수까지 포함하면 매일 1명 이상의 여성이 살해되거나 살해 협박을 받은 셈이다.

 

‘친밀한 관계의 남성’은 배우자 또는 동거·소개팅·채팅·조건만남 등으로 알게 된 남성을 말한다.

 

이 단체는 지난 15년간 집계한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한 여성살해(살인, 살인미수 포함) 피해자 수는 3058명이라고 밝혔다.

 

여성의전화는 “이 통계는 언론에 보도된 최소한의 수치로 보도되지 않은 사건을 포함하면 더 많은 피해자가 있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경찰은 교제살인이 형법에 정의된 게 아니어서 한 해에 몇 건이나 발생하는지 통계를 잡지 않는다.

 

교제폭력 건수는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 교제폭력으로 검거된 피의자는 1만3939명으로 2020년 8951명 대비 55.7% 증가했다. 범죄 유형으로는 폭행·상해(9448명, 67.8%)가 가장 많았고, 체포·감금·협박(1258명, 9%), 성폭력(453명, 3.2%) 순이었다. 지난해 교제폭력 경찰 신고는 7만790건이나 된다.

 

◇교제폭력 대책은?

 

한국여성의전화는 “지난 수십 년간 현장에서 친밀한 관계 내 여성폭력의 해결을 위한 국가 통계의 필요성을 강조해 왔으나, 여전히 국가 통계는 없다”고 비판했다.

 

여성의전화는 “우리는 더 이상 여성살해 통계를 발표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원한다”며 “국가는 여성폭력 없는 세상을 위해 정확한 실태를 파악하고 해결을 위한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성의전화는 교제살인의 원인이 “피해자가 자신의 통제 하에 있어야 한다는 가해자의 잘못된 통념, 가해자의 행태를 용인하는 사회 구조적 성차별”에 있다고 분석했다.

 

현재 교제폭력 피해를 막기 위한 법률적 수단은 별로 없다.

 

교제폭력은 가정폭력, 스토킹 범죄에 해당되지 않은 경우가 많아 입법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스토킹 범죄에 해당하려면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상대방 의사에 반해 정당한 이유 없이 불안감, 공포심 등을 일으켜야 한다.

 

스토킹처벌법에 따르면 경찰은 피해자 보호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경우 법원 영장을 받아 피의자를 구속할 수 있다. 최대 1개월 간 가해자를 유치장, 구치소 등에 유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제폭력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가족 구성원에 해당되지 않고 반복적으로 범죄가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 임시 조치가 가능하지 않을 때가 많다.

 

교제폭력 관련 법안들은 그동안 꾸준히 발의됐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2021년 더불어민주당 권인숙, 박광온 의원은 ‘가정폭력방지법 일부개정안’을 통해 가정폭력방지법 적용 범위를 교제폭력으로 확대하자고 제안했다.

 

김미애 국민의힘 의원 등도 지난해 7월 ‘데이트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지만 이 역시 소관 상임위인 여성가족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했고 이번 국회 회기가 곧 종료됨에 따라 자동폐기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교제폭력을 형법상 중요 강력범죄로 규정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지적한다. 그래야 실태에 대한 조사와 통계가 뒷받침될 수 있고, 이를 예방하기 위한 공권력 개입과 피해자 보호조치가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