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건강칼럼> 치매·파킨슨병 환자에게 절실한 재택의료

 

한국헬스경제신문 | 박건우 고려대 안암병원 신경과 교수

 

오랫동안 치매 환자와 파킨슨병 환자를 진료하여 왔다. 뇌에 발생하는 대표적 퇴행성 질환인 치매(알츠하이머)는 인지 기능을, 파킨슨병은 운동 기능을 서서히 무너뜨린다. 오래 만나다 보니 보호자들과도 잘 알고 지내며 환자 치료 과정에서 긴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오늘도 어머님은 같이 안 오셨네요. 잘 지내고 계신가요?”
“아버님이 못 오신 걸 보면 몸이 많이 안 좋으신 모양이네요.”


보호자가 대신 약 처방을 받으러 오면 무심히 건네는 대화다. 문제가 없으면 다행이다. 그런데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간병하는 사람에게 마음 편한 날이 얼마나 있을까? 보호자 혹은 대리인이 환자의 상태를 의사에게 말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그 마음을 잘 이해한다. 그리고 그 상황에 따라 처방도 하고 조언도 한다.


과연 이러한 진료가 환자를 제대로 치료하는 과정일까? 실제로 치료해야 할 환자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한 지 1년이 지났다. 보호자의 얼굴은 기억하는데 정작 환자의 얼굴은 가물가물하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상황이 불편함으로 다가왔다. 이 불편함의 이유를 나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또한 현재의 의료 시스템 아래에서는 이 이유를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을 느낀다.


파킨슨병은 운동 능력이 얼마나 떨어지고, 보행 기능이 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아야 하는 특성을 지닌 병이다. 단순히 약을 타러 온 보호자의 설명만 들어서는 부족하다. 영양 상태는 어떤지, 욕창은 잘 관리되고 있는지, 굳어져 가는 관절은 어느 정도의 운동 범위를 보이는지 등등 의사가 알아야 할 정보를 습득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환자가 병원에 온다면 알 수 있겠지만, 보호자를 통해 듣는 것은 아무래도 정확성이 떨어진다. 때로 보호자의 기억에 윤색과 과장이 더해지면 영 다른 방향으로 처방이 될 수밖에 없다. 다만 이 상황을 환자도, 보호자도, 의사인 나도 그 당시에는 잘 알 수 없을 뿐이다.


보호자가 한마디 한다.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저도 잘 알지만, 선생님께서 저희 집에 오셔서 어머니를 직접 보시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더 명확할 텐데요. 그리고 어머니도 무척 보고 싶어 하세요.”


오죽하면 이런 말까지 할까. 보호자의 안타까움과 답답함이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러다 문득 옛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분명 예전에는 불편한 어르신을 위해 의사가 찾아가던 시절이 있었는데….’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면서 노인성 질환은 급격히 증가했다. 의료계 또한 급성기 환자에 대한 대응과 함께 노인성 질환에 대한 대응 방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시대적 압박을 받고 있다. 노인성 질환의 특징은 인지 및 운동 능력의 소실이다. 관절염, 노쇠 등 으로 보행 기능이 저하되어 있다면 어떻게 병원에 갈 수 있을까?


노인 인구가 늘어나면 그들을 모시고 병원에 갈 사람도 줄어들 것이 뻔한데, 우리는 아직도 노인성 질환 환자들을 병원에 오라고만 한다. 의사가 집으로 가서 진료하는 것은 노인성 질환을 현장에서 보다 명확하게 파악하여 불필요한 진료비를 줄이고, 환자가 병원까지 오면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을 낮춘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 의사로부터 직접 듣는 조언과 격려는 환자에게 큰 도움이 된다. 그것은 약 처방만을 위해 환자를 대신해 온 보호자가 결코 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렇다면 왜 방문 진료가 활성화되지 못했을까? 「의료법」 제33조는 “의료인은 ‘의료기관 내’에서 의료업을 하여야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 부분이 ‘방문 진료를 활성화해 보면 어떨까?’ 고민하고 있는 의료인의 입지를 제한한다.

 

그러나 교통사고 등 갑자기 발생한 응급 환자가 있는 경우, 환자 또는 환자 보호자의 요청이 있는 경우에는 의료 기관 외 진료가 가능하다는 예외 규정이있으므로 이에 따라 의료 행위를 한다면 법적인 문제는 없다. 


여기에 걸림돌이 하나 더 있다. 방문 진료에 대한 진료비 수가가 책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나가서 진료하는 것은 가능하나 이때 발생하는 의료 행위에 대해 청구할 수 있는 법적 기준이 없
다. 현재 1차 진료 의사들에 한하여 ‘방문 진료 시범 사업’이라는 예외 사항을 적용하여 일부 방문 진료를 허용하고 있지만 활성화되지 못했다.

 

참여하는 의사도 많지 않을뿐더러, 서비스에 대한 표준도 잡히지 않았다. 게다가 의대생 교육 과정에도 이런 내용에 대한 커리큘럼이 포함되어 있지 않아 지속적으로 시행이 가능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의료 시스템은 뜻을 지닌 몇몇이 자원봉사를 하는 식으로 해서 는 변할 수 없다. 노인의 운동성이 바닥으로 떨어졌다면 환자가 아니라 의사가 다가가야 한다. 으리으리하게 큰 건물을 지어 놓고 언제든 그리고 누구든 오라고 광고하듯 떠벌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누구나 쉽게 찾아갈 수 있는 병원, 더 나아가 의료진이 환자를 찾아가는 의료 시스템이 필요한 시점이 온 것이다. 이에 대한 고민을 정부도 건강보험공단도 그리고 국민도 같이하였으면 한다.


의논하듯 나의 고민을 늘어놓았더니 친구가 한마디 한다. “그냥 네가 진료 가방 들고 환자 집으로 찾아가면 되는 거 아냐? 네가 안 가는 것이지, 시스템 때문에 못 가는 거라고 변명하지 마라.”
친구의 말에 이렇게 답했다.


“그래, 나는 나를 반기는 환자의 모습이 그리워서라도 그들을 찾아갈 거야. 그런데 환자와 의사가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의료의 길이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시스템 역시 변화해야 하지 않을까?

 

모든 사람이 슈바이처가 될 수는 없어. 우리의 뒤를 잇는 후배들이 자신의 의료 행위로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 또한 결국 환자들이 양질의 혜택을 받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때 친구가 빙긋 웃었는지, 실소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 길이 옳은 방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문득 어린 시절 보았던 ‘왕진 가방’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떠
올랐다.

 

* 이 기고는 대한보건협회 <더행복한 건강생활>과 함께 제공됩니다.